한반도의 상처, 6·25 한국전쟁 되짚어보기(전쟁의 원인, 과정, 영향)

종전협정의 이야기가 오가는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우리나라에겐 아픔의 역사인 6·25전쟁이 68주년을 맞이합니다. 매년 6월 25일, UN기념공원 등 다양한 기관에서 6·25전쟁 참전용사 추모식이 열리는 것을 알고계시리라 생각되는데요. 오늘은 6·25전쟁이 68주년을 맞아 안타까운 민족의 역사, 6·25전쟁에 대해 조금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6·25전쟁


(▲이미지출처 : UN기념공원 홈페이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한국전쟁은 수많은 인명피해 뿐만 아니라 전 국토를 황폐하게 만들 정도의 막대한 재산 피해를 발생시켰습니다. 최근 좀 더 친밀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남북이 분단된 상황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진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전쟁통에 이별의 아픔만을 기억하고 서로 만날 수는 없는 현실이 아직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뼈 아픈 역사인 6·25 전쟁. 과거의 일일 지라도 우리 민족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되겠죠.




6·25 전쟁의 배경




6·25 전쟁이 일어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남북이 분단된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서 우리나라는 일본의 강제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지요. 불법적인 일제강점기 시절의 종결, 우리 조상들의 투쟁으로 일구어낸 환희와 희열의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1943년 11월에 열린 카이로 회담에서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독립을 약속 받았지만, 그 후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 상황이 반전됩니다. 소련의 참전 약속이 원인이었고, 얄타 회담에서 신탁 통치가 최초로 언급되며 결과론적으로 분단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이 참가한 포츠담 선언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 받았으나, 광복 이후 1945년 12월에 열린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신탁 통치 여부를 논의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미·소 공동 위원회에서부터 UN총회에 상정되어 정부수립에 관한 사항이 결정되기 전까지 김구, 김규식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이 결정된다. 그렇게 남한 단독으로 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후,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정부가 수립되지만, 실질적으로는 1946년부터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라는 이름을 내걸고 비공식적으로 정부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분단의 원인이 외세만이 아니라, 민족 내부 이념·사상의 차이도 분명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렇게 남북분단이 된 상황이 6·25 전쟁의 원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6·25 전쟁의 발발 과정



<▲이미지출처 : 인천상륙작전기념관(http://www.landing915.com/)>


북한은 소련과의 국사비밀협정을 통해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애치슨의 선언으로 한반도 전선이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되었고, 미국이 철수하게 됩니다. 게다가 1950년 우리 국군의 비상경계령 해제로 당시 국군 장병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숫자가 외출을 한 상황이었습니다. 중국과 소련을 등에 업은 북한에게 유리한 상황이 마련되었고, 이 틈을 타 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 전역에 걸친 북한의 불법 남침이 시작되었습니다. 군사대비태세가 부족했던 우리 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북한 인민군에 당할 수 밖에 없었고, 사흘만에 서울을 함락당하게 됩니다.


6월 27일,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 회원국들에게 대한민국의 원조를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지만, 1개월 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게 되고 남북이 대치하는 구도가 지속됩니다. 상황이 반전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인천 상륙 작전을 통해서입니다. 1950년 9월 15일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허리부터 절단한다는 기막힌 작적으로 인천상륙작전이 진행되었고, 좋지 못한 전황 속에 인천 상륙 작전을 통해 극적인 반등의 기틀을 마련하게 됩니다. 이후, 9월 15일 월미도에 상륙하여 인천을 점거하고 28일에는 서울을 수복하게 됩니다. 이 기세를 몰아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까지 탈환하고 압록강까지 도달해 전쟁의 끝을 눈 앞까지 두게 됩니다.


하지만 수세에 몰린 북한군의 지원 요청을 받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상황이 재반전됩니다.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는 중공군의 기세에 우리 군과 유엔연합군은 1950년 12월 15일 흥남에서의 철수에 이어 서울을 재함락(1951. 1. 4) 당하게 됩니다. 이후 38도 선을 기점으로 승자없는 치열한 전투가 지속됩니다.


1951년 6월 소련의 휴전협정 제안을 통해 휴전 회담을 시작합니다. 당시 이승만 정부와 우리나라 국민들은 휴전을 결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휴전이 확정(1953. 7. 27)되어 38도 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 두개의 정부, 두개의 나라가 한반도에서 공존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6·25 전쟁 UN 참전국(16개국)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그리스, 터키, 호주, 뉴질랜드, 콜롬비아, 필리핀, 태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에티오피아





6·25 전쟁의 영향



6·25 전쟁으로 인해 우리나라가 받은 피해는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수많은 인명피해는 물론이고, 헤아릴 수조차 없는 막대한 물질적·정신적 피해를 초래했습니다. 가족을 두고 마음대로 서로 오갈 수도 없는 이산가족, 전쟁 고아와 사상자만 해도 수백만에 달할 정도로 한국 전쟁의 후유증은 엄청났습니다.


국가제반시설은 물론이고 산업구조가 붕괴되어 국내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음은 물론입니다. 남과 북은 현재까지도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수천년 역사동안 하나였던 한반도가 쪼개진 상황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세계대전으로 발생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지요.


종전협정 이야기가 오가는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휴전[休戰]'이 '종전[終戰]'으로 되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통일이라는 민족 최대의 목표를 향해 아직도 갈 길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과거의 일을 들추어 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국가 안보와 대비태세를 철저히 하는 것은 물론이겠지요.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말이지요.



이상 6·25 전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전쟁참전용사들을 기리고, 우리의 아픈 역사를 다시 한 번 상기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쪼록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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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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